#1

책장 꼭대기, 오래된 플라스틱 가방을 꺼냈다. 초등학교 삼 사 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받은 거의 모든 편지가 들어 있는 그 가방은 내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함께한 못 버린 물건이다. 사실 버릴 수 없고 버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오직 한 사람을 향한 그 편지는 유독 겨울에 쓴 사람이 많다.

"너 겨울방학 때 이사 간다며. 정말이니. 이사 가서도 꼭 편지 써, 알겠지." (초등학교 친구 근영)

"내가 저번에 언니한테 2000년 동전을 줬잖아. 새해가 되기 전에 그해 동전을 가지고 있다가 새해가 되는 날 버리면, 나쁜 일이 다 씻겨 나가고 좋은 일만 생긴대." (사촌동생 정수)

어느 편지엔 이런 구절도 있었다.

"사랑은 짧게 웃고 길게 우는 것." (중학교 친구 현진)

"나도 요즘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이름을 쓰지 않은 친구)

매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카드를 써준,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사람도 있다.

"주아 생일과 성탄절을 축하하며 착하고 씩씩하고 마음이 고운 어린이가 되길 바란다." (아빠)

앞으로 이 가방을 더 소중히 보존해야 할 것 같다. 오직 편지만이 가능한 짧은 세상이 여기 있으니까.

#2

11월 첫 주에 반팔을 다 입어본다고 허허 웃다가 저항도 못하고 일주일 만에 패딩을 꺼내 입었다. 절기를 보니 입동이 지나 있었다. 이 불확실한 정확함. 기후는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절기만은 기묘하게 정확한. 어떤 경우에도 내빼지 않는 확신의 겨울. 사람 마음도 그럴까. 열한 달의 힘을 불확실하고 정확하게 소진한 요즘 내 심신은 이 말을 흡수했다.

"저는 친한 사람 자주 안 만나요. 아까워요. 그쪽에서 오거나 또는 진짜 내 마음에서 어느 날 비가 오거나 그럴 때 걔 생각이 굉장히 난다 할 때, 그럴 때 연락을 해요. 오히려 그게 오래갈 수 있는 비결 아닌가…" 양희은이 말했다. 시를 말했다.

"우리 사이엔 이만한 거리가 있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대신 죽어줄 수도 없는 거리."

긴밀하고 밀착된 사이보다 바람이 통하는 관계가 좋다는 양희은의 말에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너무 꽉 찬 관계의 열망 속에 살고 있었구나. 중요한 망 하나가 서로 다름이 판명 날 때 나는 슬퍼 얼어붙는구나. 거미줄이 얼 듯, 고드름 떨어지듯, 그런 겨울이 왔구나. 자연스럽게.

#3

올해 몇 통의 편지를 썼을까. 세어보니 빵통. 그러고 보니, 편지 가방 속엔 바로 옆 동네 사는 친구가 우표를 붙여 보낸 편지도 있었다. 그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일부러 기다려 받았던 편지. 친구가 더 잘 알았던 우리 집 주소. 우표가 떨어지지 않게 딱풀 뚜껑으로 꾹꾹 누르던 모서리. 올해가 다 지워지기 전에 한 통 쓰고 싶다. 겨울 어느 날 눈이 올 때, 걔 생각이 굉장히 난다 할 때.

편지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의 문화다. 레디터가 우리 책방 근처 ‘반촌’이라는 동네에서 한 달 팝업스토어를 열었을 때, 이사 온 친구 만나러 가듯 걸어가는 길이 조금 설렜다. 편지지도 사고, 편지 쓰는 사람 뒷모습도 눈에 담고, 책방 손님들에게 레디터 가는 길도 안내하고, 레디터 손님들이 책방 문을 열고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편지 한 통에 담긴 무수한 마음,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얼굴. 오늘은 내 오랜 편지 가방을 열고 꿈에 그 얼굴 보러 가야지. 삐뚤빼뚤한 글씨를 마음에 두르고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날아가야지. 바람이 선선해질 때까지 어느 날 편지할 때까지.